들어가며
존 카터 코벨은 누구 보다도 일본의 문화를 사랑했고 열정적인 학자였다. 1941년 백인으로써는 처음으로 일본 미술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오랜 시간동안 일본의 스승들과 많은 학술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37년간의 교수 생활을 마치고 1978년 한국을 방문 후 일본 고 미술의 뿌리가 한국임을 깨닫고 자신의 연구 업적을 부정하는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이 책은 한국 체류 후 오랜 컬럼 활동으로 연재되었던 그분의 글을 모아 놓은 것이다. 미술품을 통하여 일본 그리고 한국의 문화 원류가 부여임을 알게 된 코벨 교수님은 글이나 서적으로는 알 수 없었던 고대의 수수께끼를 예술품이라는 단서로 거침없이 풀어 간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며 한국인 보다 한국을 사랑했던 그분의 생각을 따라가 본다.
부여족과 말
원래 일본에는 말이 없었다. 삼국지 위지전에는 3세기는 왜국에는 말이 없었다는 구문이 나온다. 즉 한반도로부터 기원한 도래인이 고대 일본을 정벌하면서 함께 한 말이 지금의 일본말의 조상이다. 저자는 이 말의 품종을 북방 민족이었던 부여족이 남하하면서 이끌고 온 즉 몽골말 품종으로 보고 있다. 미국이나 서구의 주요 일본관에 전시되어 있는 일본의 토기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 조랑말로 보이는 말의 토우가 있었다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 부여인들이 왜에 발을 딧는 순간부터 말이 함께 했고 당시 이들을 막아야 했던 현지의 선(先) 이주민들에게는 소총 한자루 들고서 전차를 맞이한 보병의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정벌은 손쉽게 진행되었고 이전 보다 좀 더 강력한 통치 체제를 가지고 있는 정권이 왜에 설립된다. 저자는 이 369년 왜를 점령한 도래인을 한국의 김해 지역에서 출발한 무속 기반의 무사 집단이라고 보았다. 시기적 판단의 근거는 서기 400년 이후 일본 고분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다량의 마구들이 출토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마구와 함께 이주 당시를 추정할 수 있는 무사와 말 그리고 배를 표현한 토우들이 이 추정을 강력하게 뒷받침 한다.
바다 건너 왜로 - 부여 기마족의 왜 정벌
저자는 선비족에 밀려 남하한 부여족의 일부가 백제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때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공주가 있었으며 백제의 왕은 그녀를 강력한 도시 국가였던 가야 연합의 비로 시집을 보냈고 그녀를 신공 왕후로 추정한다. 신공 왕후와 무내숙니 (다케우치노 스쿠내)는 369년에 한반도의 남단에서 부여족을 주축으로 한 백제, 가야, 신라 출신의 무사 연합집단과 왜로 출발한다. 본래 한 지역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는 기마족은 외부 민족에 합류에 대하여 관대한 편이며 따라서 출항에 한반도 남부 출신들을 대거 대동 했을 것이다. 김해를 출발한 이주 집단은 왜의 북규슈 쓰루가에 상륙하여 손쉽게 토착 세력을 제압하고 내륙으로 이동하여 최종 야마토 평야에 정착했다. 코벨 박사는 이 집단이 야마토 정권의 시초로 보았다.
학자들의 부여기마족 연구
그리피스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iot Griffis)는 1870년부터 1880년경까지 10년동안 동경대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영문으로 된 '은자의 나라 조선'이라는 책을 집필 한 분이다. 그리피스는 일본을 정벌한 진구왕후가 한국에서부터 도래한 무녀라는 데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그 정벌 집단이 부여족이라는데에도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일본 예술의 근원은 한국이며 일본 고유의 예술은 9세기에나 들어 발생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코벨 박사가 자신보다 100여년에 앞섰던 선구자의 주장을 신뢰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그리피스가 한일 합방전에 일본에 10년간 머물면서 지금은 이미 사라진 많은 고(古) 서적을 접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침탈 과정의 정당성 부여를 위하여 많은 역사 왜곡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이루 헤아릴수 없는 귀한 서적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기다 사다기지와 에가미 나미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 1921년에 기다 사다기지는 "부여는 한국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는 건국 했을 뿐만 아니라 4세기에 일본으로 건너와 나라를 세웠고 적어도 한국의 삼국과 일본, 4개 나라의 건국에는 모종의 연관이있다"라는 주장을 한다. 그의 주장은 '기마민족설' 이론의 최초 창시자 불림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후 에가미 나미오라는 학자는 한반도의 기마민족이 규슈를 정벌하고 그 뒤 일본 본토에 자리 잡았다는 주장을 이어 간다. 그러나 일본의 고분에서 한반도 삼국과 동일한 유물이 나올 것을 우려하여 발굴 금지하는 그들의 역사 왜곡의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주장은 일본에서는 전혀 존재감 없이 잊혀져 갔다.
개리 레저드
미국 컬럼비아대의 개리 레저드 교수 또한 일본에서 처음으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만든 것은 한국인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일본의 지명은 '후루'를 부루 또는 부여와 같은 뜻으로 보았다.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재미있게도 저자는 1986년 9월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성황 봉송로 3개 코스를 보면서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동부, 중부, 서부 3개 루트로 진격했던 역사를 떠올린다. 굳이 이순신 장군을 거론하지 않아도 임진왜란에 대한 내용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저자가 이 전쟁을 거론한 이유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수많은 우리나라의 고대 유물이 어떤 경로로 일본에 남이 있는지를 유추하기 위한 단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 신자였던 가토 기요사마가 수많은 불교 미술품들을 전리품으로 일본에 가져 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듯 하다. 지금도 다이도쿠지(大德寺)에 있는 등신대 크기의 목제 나한상은 임진왜란 당시 기요마사가 강탈한 예술품이다.
나아가며
본 저서는 애초에 논문이나 책으로 엮기 위해서 작성되었던 글이 아니다. 천여 편이 넘었던 일간신문과 월간지에 실렸던 칼럼과 논문을 유사한 내용으로 분류한 모음의 결과물이다. 일부 존 코벨의 글이 아닌, 유사한 주장의 서적 내용이 섞여 있으나 작자의 의도와 크게 이질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마도 진실을 보고자 하는 학자들의 마음이 서로 통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은 무언가를 주장하기 위한 논문 처럼 많은 근거를 짜임새 있게 펼쳐 놓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글이 한일 고대사에 대한 유물과 자료가 전혀 없었던 1970 ~ 80년대 써졌다는 점이 매우 놀랍다. 특히 어느 누구도 동조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매우 합리적이면서도 창이적인 상상력을 이용하여 고대사를 짜임새있게 구성했다는 점은 학자의 관점에서도 높이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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